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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스크랩] 다산 (茶山)정약용(丁若鏞)선생 유적지편

바버정 2013. 3. 20. 08:03

 

 

 

      다산 (茶山)정약용(丁若鏞)선생

 

 

 정약용 [ 1762.6.16~1836.2.22]

본관 나주(). 자 미용()·송보(). 초자 귀농(). 호 다산()·삼미()·여유당() 사암()·자하도인()·탁옹(籜)·태수(叟)·문암일인()·철마산초(). 가톨릭 세례명 안드레아. 시호 문도(). 광주()(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. 1776년(정조 즉위)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()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이듬해 이가환() 및 이승훈()을 통해 이익()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. 1783년 회시에 합격, 경의진사()가 되어 어전에서 《중용》을 강의하고 1784년 이벽()에게서 서학(西)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.

 

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()를 거쳐 검열()이 되었으나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(西)의 탄핵을 받고 해미()에 유배되었다. 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()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 성제()와 기중가설()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() 수축에 기여하였다.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()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. 

 

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()사건에 둘째 형 약전()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()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부사직()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()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. 그 후 곡산부사(使)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,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.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(순조 1) 신유교난() 때 장기(鬐)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()에 연루되어 강진()으로 이배되었다.

 

 

   ▲ 유적지를 알리는 표지판.

 

   ▲  유적지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天一聞.

 

   ▲ 정약용선생의 유물함 보관실 전경.

 

  ▲  전시관 입구.

 

 ▲ 다산유적지 년혁

 

   ▲  天下의 지상군들.

 

   ▲ 거중기 설명 참조.

 

   ▲  전면에서 바라본 거중기의 모습.

 

   ▲ 본관 들어가는 건물.

 

   ▲  선생의 대해서 알리는.

 

   ▲  본관은 두개문으로 되어있음.

 

  ▲  정문에서 바라보이는 한옥은 정약선생의 귀빈을 모시는 건물.

출처 : 권태사(權太師)
글쓴이 : 복야34世:권영민 원글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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